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코스 3세 (문단 편집) === 이집트 전선 === [[파일:셀레우코스 터키 2.jpg|width=800]] BC 205년(혹은 BC 204년), 라피아의 영웅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아직 유아에 불과한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가 즉위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것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마우리아 제국과 함께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요한 맹우(盟友)였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손을 잡았다. 두 군주는 이집트, 페르가몬, 트라키아를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분할하고, 서로가 필요하면 즉시 군대를 지원해 주기로 하였다. 이번에는 페르가몬이나 로도스 등이 셀레우코스 제국이 팔레스티나를 손에 넣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BC 200년, 안티오코스 3세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오론테스 왕가를 멸망시켰다. 앞으로 10년간, 아르메니아 고원은 안티오코스 3세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거대한 봉신국체계를 수립한 안티오코스는 '대왕'이라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유하여 그에게도 '대왕'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안티오코스 3세와 필리포스 5세의 계획을 로마가 알게 되었다. 로마는 사절을 보내, 이집트 그 자체만은 침공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두 군주는 그런 요구에 흔쾌히 응했고, 로마의 사절은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돌아갔다. 같은 해인 BC 200년, 안티오코스 3세는 드디어 팔레스티나를 침공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출신의 유능한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장군, 스코파스의 눈부신 활약은 안티오코스 3세를 또다시 좌절시키는 듯 했다. BC 199년에는 스코파스의 지휘하에 이집트군이 팔레스티나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군을 거의 몰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스코파스의 운명은 여기서 끝이었다. BC 198년, 오늘날 요르단인 파니온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군과 프톨레마이오스 제국군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파니온 전투에서 스코파스는 셀레우코스군이 동방으로 원정하면서 안티오코스 3세가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카타프락트]]의 매운 맛을 봐야만 했다. 개전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셀레우코스 제국의 카타프락트는 이집트의 기병대를 쓸어버렸고, 그들은 그대로 도주해버렸다. 버림받은 보병대는 측면에서 들어오는 카타프락트와 정면에서 들어오는 [[팔랑크스]]의 공격을 막아낼 재간이 없어 결국 이집트군은 여기서 대패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염원해오던 팔레스티나 정복을 마침내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의 기세는 바야흐로 절정에 달해 있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획득했고 유대인의 신전국가에는 특별한 권한을 허용했다. BC 195년의 평화조약에 의해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100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남부 시리아 지방과 소아시아의 이집트 영토를 영원히 소유하게 되었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진군하던 필리포스 5세는 로도스 및 페르가몬과 전쟁을 벌였다. 두 나라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로마에 원정을 호소하면서 두 헬레니즘 왕 사이의 동맹 사실을 알렸다. 이에 로마는 헬레니즘 국가간의 관계에 결정적으로 개입해왔다. 필리포스 5세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00~196)에서 로마에게 패배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그를 돕지 않았고, 도리어 로마가 필리포스 5세와 싸우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집트에 침입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또한 그는 딸 [[클레오파트라 1세]]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켰다. 이집트는 사실상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향하에 놓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